
서툰 고백
w. 리코
살다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고 부딪쳐온다. 아직 21살이고 그렇게 많이 살아본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자라왔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도 많고, 정상인들도 많다. 남자들도 특성이 다양하고, 여자들도 특성이 다양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쳐 지나온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해도, 인상에 깊게 박히는 사람들은 몇 있다. 예를 들면…내가 정말 존경하고 좋아했던 사람이라든가, 아니면 주먹질을 할 정도로 크게 싸운 친구라든가. 혹은, 나를 정말 좋아하는 한 소년이라든가.
*
“…언제까지 따라오려는 건데?”
“따, 따라가긴! 안 따라갔어!”
“너랑 나랑 강의실 다른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핵심을 콱 찌르는 말에 녀석이 흠칫 어깨를 떨더니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한다. 손에는 교재를 들고 등에는 백팩을 맨 채 제 뒤를 쫓는다. 아니, 저럴 거면 가방 안에 책을 넣지 왜 굳이 들고 다닌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녀석을 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주머니에 꽂아두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면, 아직 수업 시작하기까지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위치를 빠르게 파악했다. 이내 뻔뻔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한 채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는 녀석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며 녹색의 눈이 살짝 커진 채 저를 향한다. 아니 무슨, 누가 보면 내가 너 잡아먹는 줄 알겠다.
“…어디가? 세나 그쪽 아니잖,”
“네 강의실 간다 왜.”
“응? 내 강의실? 거기는 왜?”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얼굴로 저를 빤히 쳐다본다. 그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녀석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싣는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그럼 듣지도 않는 수업에 들어올 생각이었어?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따라오지 그래.”
“세나! 세나는 손도 엄청 예쁘다!”
“시끄러워 좀….”
어김없이 특유의 낯부끄러운 소리를 늘어뜨리며 녀석이 말했다.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었나 보다. 살짝 미열이 오른 얼굴을 녀석에게서 돌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일찍 가서 쉬고 있을 생각이었으니 뭐, 그거 잠깐 데려다준다고 안 될 거야 없겠지. 녀석은 뒤에서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무슨 말이 저렇게나 많은지, 입에 모터라도 달린 듯 쉬지 않고 움직인다.
“레오 군.”
“응?”
“너 진짜 나 좋아해?”
성큼성큼 발을 옮기며 제 강의실과 멀리 떨어진 건물로 향하는 길에 아무렇지 않게 툭 내던졌다. 그러자 쉬지 않고 떠들어 대던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잃는다. 종알거리다 말고 순식간에 조용해진 것도 모자라, 잡혀있던 손목을 확 빼낸다. 갑자기 허전해진 손바닥에 고개를 홱 돌려 뒤를 쳐다보면, 녀석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장이 나있었다.
당황함에 벌어진 입을 쉽게 다물지 못하고, 숨기지 못하는 감정으로 붉게 번져버린 얼굴. 귀가 아플 정도로 말을 늘어뜨리던 입이 멈추며 부자연스러운 숨결만 내보내는 녀석을 보고 나서야, 나는 다시금 자각할 수 있었다. 아, 얘가 나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하고.
“그…그니까….”
눈동자를 이리 뒀다 저리 뒀다 안절부절 못하는 꼴이 어째 우스웠다. 항상 보던 천진난만하고 시끄럽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런 모습은 꽤 신선하네. 하마터면 입꼬리가 씰룩이며 솟을 뻔했다. 이럴수록 냉정해져야 하는데, 녀석의 반응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좋아한다는 티를 엄청 내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자꾸만 웃음이 새었다. 그러니까…인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조금, 귀여운 것 같아서.
“됐어. 강의실이나 가자.”
제 손을 벗어나 찬 공기만 가득 맴도는 손바닥을 매만지다 이내 다시금 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굳이 안 잡아도 되는 거였지만, 이상하게 녀석만 보면 자꾸 골려주고 싶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삐거덕대는 그 모양새가 귀여워서, 왠지 장난치고 싶어지니까.
녀석의 강의실로 향하는 길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늘 하나 없이 햇빛으로 가득한 길을 걸어야 했기에, 나는 벌써부터 기운이 다 빠졌다. 잠시만, 생각해보니까 얘를 데려다주고 나는 다시 내 강의실을 가야 하잖아. 그럼 이거 나만 손해 보는 거 아니야? 터벅터벅 힘없이 움직이던 발걸음이 우뚝 멈춘다.
“……레오 군.”
“응?”
“너무 더워서 도저히 안되겠어. 여기까지만 데려다줄 테니 나머지는 너 알아서 가도록 해.”
“에? 자, 잠깐, 세나?!”
뒤도 안 돌아보는 쿨한 모습으로 망설임 없이 발을 돌렸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가는 녀석의 얼굴이었다. 보나 마나, 벙찐 채 나를 보고 서 있겠지. 하지만 너무 더워서 도저히 끝까지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녀석을 데려다줄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다지 시원하지도 않은 손부채질을 해가며 시간을 확인했다. 여전히 시간은 여유로웠다. 근처 카페라도 들릴까 했지만, 너무 더워서 일정 거리 이상 움직이기가 싫었다. 얼른 가서 에어컨 빵빵한 자리에 가 앉아야지.
“어라, 세낫치-”
더위에 지쳐 잔뜩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기분 나쁜 녀석이 걸어온다. 뭐야 저 보송한 얼굴은. 진짜 초 짜증 나네. 절로 얼굴을 구기며 심드렁한 모습으로 반기면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제게 가까이 다가온다.
“어디 가는 길?”
“어디겠어. 당연히 수업 들으러 가는 길이지.”
“그러지 말고 오늘 술 어때? 수업 째고 가자-”
“아- 미안하게 됐지만, 난 너랑 달라서 말이야. 그리고 더우니까 팔 좀 치워줄래?”
가뜩이나 더운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왜 어깨동무를 하고 난리야. 자기는 뭐 보송보송해서 안 찝찝하다 이건가.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여전히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제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입꼬리를 쭉 끌어올리며 한층 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뭔데, 저 음흉하고 기분 나쁜 얼굴은.
“흐음- 그래? 그럼 츠키나가 군은 누가 챙겨주지?”
“……하아?”
“츠키나가 군 술 많이 마시면 텐션 엄청 올라가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애들이 꽤 좋아할 거 같은데. 물론 나보다야 아니지만-”
“그 녀석이 술자리에 왜 가? 평소에 잘 가지도 않는데, 보나 마나 너네가 먼저 꼬셨,”
“아아- 정 신경 쓰이면 와서 세낫치가 좀 챙겨주든가?”
얄밉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대는 놈을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젠장, 걔는 왜 평소 잘 가지도 않는 술자리에 간다고 해서…. 난감해져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뜩이나 이 교수, 수업 빠지면 꽤나 골머리를 앓을 텐데. 머릿속에서 엄청난 갈등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말없이 빙긋 웃으며 저를 쳐다본다. 안 가자니 녀석이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었고, 섣불리 가자니 그거대로 망설여졌다. 수업 짼 적도 없으니까 오늘 한 번만 해봐…?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나는 비장한 얼굴을 했다.
“그래. 가자.”
역시, 신경이 쓰이는 게 더 싫다.
*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럽게 채워진 내부는 시작도 전에 지치게 만들었다. 그냥 조금 마시다가 애 데리고 나와야지. 술집에 들어서기 전부터 나는 녀석을 옆에 꼭 붙인 채 있었다. 자리에 앉는 것도 제 옆에 앉도록 했고, 위치도 금방 벗어나기 쉬우면서 눈에는 크게 안 띄는 테이블 끝자리에 자리했다. 나름대로, 체계적인 시스템이었다.
어느덧 테이블에 사람이 꽉 차고 연이어 술과 안주가 우르르 쏟아지듯 들어섰다. 테이블에 놓인 술병들을 보자마자 절로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오늘도 거하게 마시려나 보네. 나는 물수건으로 손을 가볍게 닦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 씨….”
젠장. 나중에 도망칠 궁리만 하다 보니 주변 신경을 안 썼다. 하필이면 레오 군 앞에 자리한 인간은 말술로 자자한 놈이었고, 제 앞에 앉은 인간은 저급한 말과 진상 짓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놈이었다. 한 마디로, 오늘 술자리는 완전 최악이라는 소리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녀석이 저를 힐끔 쳐다본다.
“세나, 왜 그래? 어디 아파?”
녀석이 걱정하는 투로 제게 물었다. 나는 바닥에 꽂아두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녀석을 쳐다봤다. 고작 이런 모습에도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는데, 내가 정말 아플 땐 어떤 얼굴을 해주려나. 생뚱맞은 생각을 하기도 잠시, 나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저를 보고 있는 녀석을 향해 꽤 비장하게 말을 이었다.
“레오 군.”
“응?”
“어쩌면 오늘 중간에 못 갈 수도 있어. 그러니까 레오 군도 자기 몸은 스스로 보호해.”
“…보호라니, 나도 술 세!”
“너보다 센 사람이 앞에 있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아무튼, 다 받아먹지 말고 적당히 마셔.”
제 말이 어딘가 빈정 상했는지 녀석이 입을 비죽 내밀며 되지도 않는 소리를 늘어뜨렸다. 그래그래, 네가 술이 세봤자 퍽이나 세겠다. 나는 체념한 모습으로 컵에 물을 따랐다. 지금이라도 물을 좀 마셔놔야 화장실에 금방 가겠지. 그럼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그대로 나오는 거야. 컵에 가득 차도록 물을 따르고 있으면,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뭐야 그게! 세나, 내 걱정 해주는 거야?”
예쁘게 웃고 있는 녀석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컵에 물을 따르던 나는 그대로 손이 멈췄다. 왠지 모르게 손끝이 저리는 기분이 들었다. 햇빛 쨍쨍한 낮도 아닌데, 술집의 조명이 센 것도 아닌데. 눈부시도록 환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이 쓸데없이 예뻐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나도 그렇게 약하진 않거든? 난 오히려 세나가 더 걱정된단 말이야! 분위기 타서 다 받아먹지 말고 세나도 조심히 마셔. 알았지?”
그러고는 대뜸 제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낯뜨거운 행동에 깜짝 놀라 녀석의 손길을 피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면 녀석의 컵이 비었다는 걸 확인하고는 빠르게 가져와 물을 왈칵 따랐다. 아직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뜨거웠다.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잊고 있었던 게 하나 있었다.
녀석은, 나를 좋아한다는 걸.
*
“술이 들어간다, 쭉! 쭉쭉쭉!”
아아,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세상은 빙빙 돌아가고 있고, 어째 힘이 자꾸 빠져. 이게 뭐야, 완전 짜증 나. 느리게 감기는 눈꺼풀은 또 왜 이렇게 무거운 건지. 최악이다, 최악이야.
“세나, 괜찮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아까처럼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저를 살피는 녀석이다. 이상하다…나도 그렇게 약한 편은 아닌데, 왜 내가 얘보다 먼저 취한 거지?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아 제멋대로 시간을 돌렸다.
초반, 아니 중반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제 예상대로 녀석과 나의 앞에 앉은 주의 요망 인간들의 술 권유가 이어졌지만 노련하게 대처하고, 어쩔 땐 적당히 받아먹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흐른다면 나쁘지 않은 몸 상태로 집에 갈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지만…항상 예상치 못한 인물이 뒤통수를 치는 법이다.
“참 세낫치! 오늘 처음으로 수업 빠진 날이네? 기념으로, 마셔라! 마셔라!”
“하아? 아니, 잠깐!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에이, 당연히 상관있지! 우리를 위해 수업을 포기한 거잖아-”
말이 통하지 않자 나는 또 한번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늘어보냈다. 수업 짼 거랑 술을 마셔야 하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굳이 정정하자면 레오 군을 위해서 포기한 건데 말이지.
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거부했지만,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술자리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기어코 제 앞으로 술이 가득 찬 잔이 내밀어지며 주위에서는 마시라는 외침이 전부였다. 그와 달리, 녀석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버틸만하긴 했지만, 살짝 불안했다.
“세낫치 빨리-! 우리 그렇게 오래 못 기다린다구-”
너는 내일 보면 죽었어. 속으로 복수를 꿈꾸며 머뭇거리다 이내 하는 수 없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주변에서는 환호가 들려왔고, 머리는 빠르게 아득해져왔다. 고작 이거 하나 마신다고 이렇게까지 될 리가 없는데, 뭐야? 술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세상이 핑 돌며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퍼졌다.
“야 너 술에…무슨 짓….”
“세낫치가 멀쩡한 게 재미없어서, 술이란 술은 다 섞어봤어!”
여전히 얄미운 모습으로 깔깔거리며 웃는다. 기필코 죽인다 진짜. 자리에 앉자마자 세상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아, 안되는데. 레오 군…내가 챙겨야 하는데…. 정신 못 차리는 저를 보며 계속 웃어대는 놈들을 향해 작게 욕을 읊조리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세나 괜찮아? 잠깐 바람 쐬러 갔다 올래?”
“으….”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시야는 자꾸만 울렁거렸고, 술로 배가 꽉 차서 기분도 별로였다. 제 어깨와 팔을 붙들은 녀석이 걱정 가득 담아 물었고 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힘겨운 신음을 내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간단하게 말을 마친 녀석이 저를 데리고 술집을 나섰다. 여전히 시끄럽기만 한 내부였다.
“어디 앉아있을까? 세나, 걷기는 조금 힘들지?”
“야…좀 조용히 해봐. 저기, 저-기 앉을래. 너무 시끄러워.”
“응, 천천히 걸어. 천천히.”
“씨이…짜증나. 왜 내가 너보다 먼저….”
생각할수록 녀석보다 먼저 취했다는 게 화가 났다. 내가 취하면, 너를 챙길 힘이 없어지잖아. 비틀거리는 발걸음과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 힘없이 축축 처지는 몸. 완전 최악이다, 최악이야. 술집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공원에 가 힘겹게 벤치에 앉았다.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운 술집과는 달리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아- 좋다…. 갈 곳을 잃고 흔들리는 제 머리는 자연스레 녀석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짜증나….”
“왜-”
“내가…먼저….”
“나보다 먼저 취했다는 게 그렇게 싫어?”
녀석의 어깨에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입을 달싹였다. 여름의 밤바람은 꽤 시원했다.
“어…. 내가 취하면은, 너를 누가 챙겨….”
“푸흡. 나? 세나, 나 챙기려고 했어?”
“그래, 이 멍청아….”
“왜? 나 술 세다니까? 지금도 멀쩡하잖아-”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려졌다. 뭐,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지만. 생각보다 녀석의 어깨는 편안했다. 그래서일까 괜히 고개를 비비적댔다. 술에 취해서 인가, 이런 행동이 녀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알면서도 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제 행동에 녀석의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불편해?”
“아니…….”
“그, 그럼?”
“그냥…네 어깨 편해서….”
아까와는 달리 어깨가 경직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갯짓 하나 했다고 몸이 굳는 게 다 느껴질 정도로 금방 반응하는데, 역시 내가 널 어떻게 저런 곳에 그냥 둬. 절대 못하지. 지금도 내가 취하지 않았더라면, 너를 데리고 그대로 집에 갔을지도 몰라. 저기는 위험하니까. 녀석이 어떻게 들을지 모를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엔 온몸에 알코올이 가득 배어 힘겨웠다. 굳게 다문 입술을 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레오 군.”
“왜-”
“너…나…좋아하지….”
“…아, 어?”
“좋아하냐고…….”
여전히 녀석의 어깨에 기댄 채, 힘들게 들어 올린 입술로 힘들게 내뱉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 들려오던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자꾸, 묻는 이유가 뭐야?”
정적이 얼마나 갈까 속으로 세어보고 있으면, 예상치 못한 말이 흘렀다. 녀석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여전히 세상은 어지럽게 돌았고, 사고는 흐릿하기만 했다. 제가 고개를 들어 올렸음에도, 녀석은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
말없이 자신의 손을 매만진다. 조용히 자신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다. 나는 그런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왜 자꾸 묻는 거냐고? 이번엔 제게도 정적이 흘렀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야…….”
나도 전부터 많이 생각해봤어. 아무리 너를 괴롭히는 게 재밌다고 해도,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는 나를 좋아하는데…나는….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녀석은 여전히 저를 보지 않았고 나는 집요하게 녀석을 보고 있었다. 눈은 녀석을 향해 있는데, 머리는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안 그래도, 나 주변에서 그런 말 많이 들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애 기대하게 만드냐고. 그거 알아? 나 오늘도 들었어. 친구한테.
“그야….”
근데 나는, 확실한 거 하나는 있어. 너를 챙기지 않으면 안될 것 같고. 네가 신경이 쓰이고, 다른 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너를 보면…되게 거슬려. 너를 건드리려는 애들도 거슬리고, 우왕좌왕하는 너도 거슬려. 그런데 나는…너랑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어. 그건 정말 모르겠어.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
바닥인지 손인지 모를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제야 마주치는 시선에 나는 왠지 모르게 다시 열이 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거든? 몸도, 마음도. 근데 지금은 좀 이상한 거 같아. 몸도, 마음도. 정확하게는…너와 밖에 나온 이후부터.
“레오 군 네가 좀 알려줘.”
“…내가? 무슨 수로?”
“지금처럼 계속 옆에 있어줘.”
당황한 얼굴을 하던 녀석은 깜짝 놀란 얼굴로 바뀌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한 건, 술을 마셔서 이렇게 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말들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녀석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녀석의 모습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이제 너를 신경 쓰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어.”
너를 챙기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어.
“네가 다른 사람 옆에 있다는 게 거슬리기 시작했어.”
네가 내 옆에 없다는 게 싫어졌어.
“어쩌면 나는, 네가 필요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너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지금처럼 계속 옆에 있어 달라고….”
내가 내 감정에 확실해질 때까지, 계속 날 좋아한다고 해줘. 내 작은 손길에도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쉽게 반응해줘. 나도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도록, 옆에서 나를 흔들어줘.
여름의 밤공기는 시원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벌레들의 우는 소리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제게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서로를 마주하는 시선을 놓지 않은 채로 아까와는 다른 긴 정적이 흘렀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네게 무슨 말을 한 걸까. 아침이 되고 나면 무진장 후회하겠지?
“…나 이제 졸려…….”
“어, 어? 졸려? 집에 갈까?”
“……응.”
녀석을 오랫동안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술 때문이야, 술 때문에 그래. 지금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도, 자꾸만 얼굴이 뜨겁게 오르는 것도. 다 술 때문에 그런 거야. 두 눈을 감고 녀석의 어깨에 다시금 머리를 대었다. 집에 가고 싶어.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왔다. 근데, 조금만 더 이렇게 있다가 가고 싶어.
조금만. 벌레들이 우는 걸 멈추면, 그때 집에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