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상동몽(異床同夢)

​-스퍄님의 일러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w. 혜미아

   바람을 타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코를 간질여왔다. 보통 사람들이 쉴 때 더 바빠지는 직업은 여럿 있었고 세나는 그 범위에 속하는 직업에 몸을 담고 있었으므로 여름방학 중이랍시고 서운하다며 일을 소홀히 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더위에 약한 이에게 온종일 땡볕 아래에서 연습하기란 보통 고역인 게 아니었다. 설상가상 바로 오늘까지 부모님과 해외 바캉스를 즐기다 온 탓에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잠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교외의 지방자치단체에서 맡긴 의뢰, 타 유닛과의 합동 라이브. 그것도 야외무대. <스타마인>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사정이 있어 받아들였을 뿐.
세나는 그늘에 마련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렇게까지 휴식 시간이 꿀처럼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귓가에는 스오우가 양해를 구하고 틀어둔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우연히 듣게 된 것에서 나이츠의 노래가 나와 꾸준히 듣게 되었더란다. 대충 듣자 하니 사연을 읽어주고 신청곡을 틀어주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방식의 방송이었다. 카사 군, 의외로 아날로그 파였나. 별다른 생각 없이 등받이에 기대어 귀를 기울인다.

「…… 다음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제 정말 완연한 여름이네요. 이렇게 더운 날에는 라무네가 특히 마시고 싶지 않나요? 예전에 친구랑 라무네 안에 들어있는 구슬이 갖고 싶다고 싸운 적이 있어요. 금방 화해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걸로 싸우기까지 했는지 후회가 되네요.’……. 하하, 다들 한 번씩 그 구슬이 갖고 싶다고 생각하죠. 별거 아닌데도 말이에요. 금방 화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지금도 그 친구와 좋은 우정을 쌓아가고 계시겠지요. 그럼 신청곡 듣고 가시죠. Bandits의 <Another Sad Song>……」

스피커에서 올드한 감성의 팝송이 흘러나온다. 경쾌한 듯한 멜로디에 실린 가사는 제목대로 즐거운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세나는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에 살며시 눈을 감는다. 이대로 잠들어도 어차피 때가 되면 누군가 깨워줄 테니.
천천히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사연 속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재작년 일이었음에도 벌써 먼 옛날 일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기억이었다. 

 

* * *

 

“이곳이 이제부터 우리의 아지트닷, 와하하하……☆”

연습실을 빌릴 처지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빈 교실을 쓰게 된 걸 ‘우리의 아지트’라고 표현하는 바보가 어디 있는지. 빈 교실이라 오랜 시간 냉방이 되지 않은 내부는 후덥지근했다. 으으, 이래서 여름이 싫다니까.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으면 옆에 있던 바보는 바닥에 드러누워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나랑 세나 둘만의 아지트, 같은 소릴 하며 활짝 웃는 게 정말이지 처음으로 제 방을 가지게 된 어린아이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저런 게 나보다 생일이 빠르다니. 본인이 태어난 날에 유감은 없으나 한숨은 이미 멋대로 입 밖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세나가 한숨을 쉬나 마나 츠키나가는 제 교복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 바닥을 신 나게 구를 뿐이었다. 그걸 굳이 입 밖에 내어 지적해봤자 나만 귀찮아지겠지.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름만 찾아오면 부글부글 짜증이 났다. 자신이 더위에 유독 약한 체질인 탓도 있었고, 열심히 세팅한 머리카락이나 공들여 한 화장 따위도 땀 탓에 흐트러지기 일쑤였기에 여름을 천적으로 여겨온 탓이기도 했다. 이 더위에 저렇게 날아다닐 수 있는 츠키나가를 존경스럽다고 여기게 될 정도다.
그래도 시원해지면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에어컨을 발명해 낸 현대 문명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기로 한 세나가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어?”

하지만 문명 발달의 산물께서는 묵묵부답이셨다. 이럴 리 없는데. 방금 일어난 사실을 부정하며 다시 버튼을 누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리모컨의 건전지가 다 닳았다거나 리모컨 자체가 고장 난 게 아닌가 하는 나름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의자를 밟고 올라가 에어컨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눌러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세나의 머릿속에서 애써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성이 점점 휘발하기 시작한다. 세나는 버튼을 다시 한 번 누르고, 다시 한 번, 다시…….

“세나?”

바닥 구르기를 그만뒀는지 어느새 츠키나가가 옆에 와 세나의 이성 출타 쇼를 관람하고 있었다. 여기 에어컨 고장 났나 봐. 탈주하려던 이성을 겨우 자리에 앉힌 세나는 침착을 붙잡은 목소리로 현 사태의 심각성을 전달했다. 찐 새우의 맛을 아무리 좋아한대도 자신이 직접 찜통에 들어앉고 싶지 않기 마련인데 이 한여름에 에어컨이 고장 난 실내에 있어야 한다니 생지옥이 따로 없다. 츠키나가는 핏기 가신 세나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기울인다.

“빈 교실이니까 전기 자체가 안 들어가 있다고 했는데? 아까 선생님이 그랬어!”
“뭐?”

금시초문이다. 빈 교실이라고 아예 전기를 빼놨단 말이야? 세나의 표정이 어찌 됐던 츠키나가는 태평하게 말을 잇는다.

“그러고 보니 방과 후에 빈 교실 사용할 거면 전기 연결해줄 테니까 말하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하아!? 그럼 말을 했어야지!”
“그치마안, 머릿속으로 악상 정리 중이었단 말야.”

저것도 변명이라고. 하지만 상대가 츠키나가 레오였으므로 변명이 아니라 진심일 테다.

“믿어지지가 않네, 넌 덥지도 않냐!? 완~전 짜증 나!”
“짜증 내지 마! 예쁜 얼굴에 주름살 생긴다! 앗, 좀 새로운 느낌인데. 인스피레이션이 솟아오른다! 좋아, 제목은 「주름살이 생겨버린 세나의 노래」……♪”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가던 츠키나가는 태평하게 그 자리에 드러눕고는 아무 종이나 가져와 거침없이 음표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주름살이 뭐 어째? 안 그래도 더워서 짜증 나 죽겠는데 더 짜증 나는 제목의 노래를 작곡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짜증으로 나라 하나는 세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세나는 분노를 담아 소리를 꽥 질러 봤지만, 이미 작곡에 몰두한 츠키나가의 귀에 닿지 않는 것 같으므로 이마를 짚으면서도 얌전히 그의 작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츠키나가의 작곡이 끝난 뒤 곧장 교무실에 찾아갔으나 담당 선생은 퇴근한 후였고 이 더위에 에어컨이 나오지 않으면 연습하기에 무리가 따를 것이므로 결국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학교를 뒤로하고 말았다. 연습 벌레인 세나에게 있어 이건 큰 오점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에 대해 잔소리를 퍼부으니 그제야 자신이 잘못한 걸 알아차린 건지 츠키나가는 공원의 큰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세나를 앉히고 ‘세나는 여기서 기다려, 금방 시원한 걸 사올게!’라는 말을 남긴 채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무리 바보라도 눈치는 있는 건가. 세나는 제 파트너가 답 없는 멍청이는 아니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돌아온 츠키나가가 오늘은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물도 아닌 라무네를 내밀었지만, 그것쯤은 가볍게 용서해줄 수 있었다. 물을 사 올 거라고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고, 건네받은 라무네의 온도가 딱 기분 좋게 시원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은 싫지 않았으니까.
츠키나가가 세나의 옆에 앉아 재잘거리기 시작해 별 영양가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 이렇게 더운데 오늘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겠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도 들었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법이다. 그늘 아래 벤치는 꽤 괜찮은 장소였고 불어오는 바람도 비교적 선선해 그간 적립해 온 모든 짜증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은 하루의 마무리가 될 것만 같았다.
츠키나가가 라무네 안에 든 구슬을 탐내지만 않았더라면.

“어떻게 뺄 방법이 없을까?”

한참 뚜껑을 분리하려 끙끙대던 츠키나가는 결국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자 구슬이 작은 소음을 내며 찰랑거렸다. 내용물은 다 마신 지 오래다. 뭘 어렵게 뚜껑을 빼려고 해. 깨 버리면 되는데. 세나가 대수롭지 않게 내놓은 대답에 츠키나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펄쩍 뛰었다. 유리병이 불쌍하단다. 별것이 다 불쌍하다고 난리다. 작은 벌레 하나도 불쌍하다고 못 죽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때까지도 세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늘 같이 지내다 보니 츠키나가의 기행에 나름 익숙해진 덕이었다. 이번에도 어느 정도 건드려보다가 질려 관둘 게 뻔하니 괜히 신경 쓰지 않는 게 맘 편하겠지. 내일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빈 교실의 전기 연결 신청부터 해야겠다며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츠키나가가 세나의 눈앞에 한참 씨름 중이던 것을 내밀었다.

“세나, 구슬 꺼내줘!”
“내가 왜.”
“난 못 하겠으니까!”

거 당당도 하시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며 병을 받아들고 그것의 주둥아리 쪽에서 최대한 손을 멀리 떨어뜨려 잡았다. 옆에 있는 큰 돌에다 대고 계란 깨는 것 마냥 병을 깨 버릴 요량이었다. 마침 주변엔 아무도 없으니 파편이 좀 튀거나 요란한 소리가 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최우선은 저였기에 조심조심 약하게 몇 번에 걸쳐 부딪힐 생각이었지만 돌에 병을 가져다 대려 하니 가만히 지켜보던 츠키나가가 또 펄쩍 뛰었다.

“깨지 마!”

아까도 병이 불쌍하니 어쩌니 했으니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 가볍게 무시하고 머릿속 시뮬레이션대로 병을 돌에 다시 대려는데 이제는 팔을 붙잡아 당긴다.

“깨지 마라니까, 바보 세나! 유리병이 불쌍하다고!”

누가 누구보고 바보라는 건지.

“병이 불쌍하긴 무슨. 뚜껑 분리하려고 낑낑대다가 레오 군도 포기했잖아?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깨는 게 답이야.”
“아냐! 세나라면 할 수 있어, 난 믿어!”
“장난해? 본인이 못 하는 걸 남에게 그런 식으로 떠넘기는 거 아냐. 그리고 난 그런 거에 시간 할애할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 깰 거야.”
“우우, 바보! 멍청이, 미역 머리! 얼굴이 예쁘면 착하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악의 제왕! 깨지 마아!”
“부탁한 입장인 주제에 말이 좀 많다?”
“세나아아!”

바로 옆에서 징징대는 꼴을 보고 있으니 잠들었던 짜증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시원했던 라무네도 다 마셔버린 후였고, 땀을 식혀 주던 바람도 그새 휴업에 돌입했다. 붙들린 팔은 땀 때문에 끈적이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하루의 마무리라니 다시 생각해보니 우습기 그지없는 판단이었다. 불쾌지수가 순식간에 한계를 돌파한다. 그리고 이럴 때의 인간은 인내심이란 것을 1mm도 키우지 못하고 아무런 말이나 내질러버리기 마련이다.

“너, 내가 엄청나게 봐 주고 있는 거 알지!? 에어컨도 안 나오는 먼지 쌓인 빈 교실에서 연습이라니 죽어도 사양이거든! 무릎 꿇고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떼를 써!? 완~전 짜증 나!”

난데없이 짜증 폭격기를 맞은 츠키나가는 놀란 듯 잠시 행동을 멈췄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저도 소리를 뱉어냈다. 세나의 성량보다는 작았다.

“그거 아까 라무네 사 준 걸로 끝난 일 아니었어? 용서해준다며!”

“오늘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그래! 네 뒤치다꺼리를 왜 늘 내가 해야 하는데!? 제발 짜증 나는 짓 좀 하지 마! 네가 어린애냐!? 나보다 생일도 빠르면서!”
“어어!? 갑자기 그런 얘기가 왜 나와!? 세나 바보! 개똥 밟고 그 반짝반짝한 구두에 다 묻고 넘어져서 머리에는 새똥 맞아버려!”
“미친, 더럽게 진짜! 말하는 센스가 무슨 그따위야!? 지금 저주 걸어!? 이 꼬맹이가!”
“가르르르, 꼬맹이라고 하지 마! 세나도 그렇게 큰 키는 아니면서!”

다른 이가 보고 있었다면 유치함에 못 이겨 말려주었을 내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 말싸움은 끝을 모르고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긴 싸움 끝에 결국 분을 못 이긴 세나가 등을 돌려 집으로 향했고, 츠키나가는 그것을 붙잡지 않았다.

 

* * *

 

매미 우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오전이면 그래도 비교적 덜할 텐데도 여전히 푹푹 찌는 더위였다. 세나는 손에 든 가방을 고쳐 쥔다.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더워지는 것 같았다. 비라도 확 내리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던 걸 관둔다. 이 더위에 습기까지 녹아들면 등굣길이 말 그대로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테다. 여름에 걸어서 등하교는 정말 미친 짓이니 만 16세가 되는 이번 년도 생일이 지나면 꼭 면허를 따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멋진 바이크를 한 대 뽑아서 타고 다니면 얼마나 편할지. 츠키나가라면 분명 ‘멋있어 세나~!’라며 찬양을 해 댈 것이다.

“…….”

세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당시엔 있는 대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심하기 그지없는 말싸움이었다. 게다가 이미 용서해주겠다고 한 일이나 평소일까지 끄집어내서 성질을 부린 건 제 쪽이었다. 유치해도 정도가 있지. 핸드폰을 확인해 봐도 여전히 츠키나가에게서는 연락 한 통 없었다. 연락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였으면 질려버렸을 테니.

‘덥다고 정신이 나갔지, 정말…….’

간밤에 핸드폰을 붙들고 속으로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는지. 당장 오늘 아침 교복 셔츠에 팔을 끼워 넣으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입으론 그런 귀찮은 녀석 떨어져 나가 준다면 도리어 고마울 지경이라고 미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머리엔 츠키나가의 웃는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늘 세나를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주며 무궁한 호의를 안겨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제게 만에 하나 부정적인 말을 한마디라도 뱉었다간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이제 말을 안 걸어주면 어쩌지. 절교 같은 걸 당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해. 어릴 적부터 모델 일을 해 온 터라 제대로 된 친구가 없던 데다 자존심이 높은 세나에게 있어 화해라는 건 나름대로 어려운 문제였다. 한참을 고민하다 긴 한숨을 내뱉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범 답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 레오 군. 왜 구슬 같은 걸 갖고 싶어 해서. 괜히 츠키나가를 탓한다. 당시에 핸드폰으로 ‘라무네 뚜껑 따는 법’이나 ‘라무네 구슬 빼는 법’ 같은 걸 검색해보고 나서 행동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같은 후회를 곁들이며. 정말 덥다고 정신이 나가긴 했던 모양이다.
그때 세나의 눈에 들어온 게 문구점이었다.
이런 곳에 문구점이 다 있었나. 평소엔 앞만 보고 목적지를 향해서만 걸으니 알 턱이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 이미 봤더라도 이런 가게엔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쳤을 테니 기억에 남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의 세나는 이곳에 시선을 빼앗겼다. 정확히는 그 앞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구슬 자루에.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알록달록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것부터 아무런 무늬 없이 투명한 것까지 여러 종류가 섞인 유리구슬 열 개 정도를 작은 그물망 안에 넣어 판매하는 방식의, 지극히 전형적인 어린아이들 구슬치기용 장난감이었다. 개중에는 라무네 병 안에 들어있는 구슬과 닮은 것도 있었다.
진짜 라무네 병에서 빼낸 구슬은 아니지만 이런 거라면 츠키나가도 만족하지 않을까.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색깔이나 무늬도 다 다르니 새롭다며 인스피레이션, 같은 소릴 할지도 모른다. 세나는 구슬 자루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츠키나가의 취향은 아직 갈피가 잡히지 않는데다 이런 걸 선물이랍시고 주는 것도 웃기지만, 그럼에도 그가 조금 더 좋아할 법한 것을 주고 싶었다. 평소에 그에게서 받아 온 호의에 조금이라도 답례하고자 하였으므로.

 

“자, 가져.”

학교에서 마주한 츠키나가의 얼굴 앞에 불쑥 구슬 자루를 내민다. 츠키나가는 제 앞에 내밀어 진 것을 한 번 보고는 곧 세나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다. 만화였다면 머리 위에 물음표가 세 개는 붙어 있을 표정이었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세나가 그 말을 가로막는다.

“이거 받고 화 풀어. 솔직히 너도 그런 걸로 싸울 필요 없었다는 거 알잖아?”

이렇게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세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제 나쁜 성격에 괴로워하고 말았다. 이렇게 말했다가 레오 군이 진짜 안 받아주기라도 하면……, 역시 화해 선물이니 좀 더 값어치 나가는 걸 줬어야……. 츠키나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죽 쒔군. 눈을 질끈 감아버린 세나의 손에서 무게감이 사라진다. 어라. 눈을 슬쩍 다시 뜨자 눈앞에 서 있는 이는 구슬 자루를 들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와하하, 하고 특유의 밝은 웃음소리로 웃는다.

“뭐야아~ 세나, 나랑 화해하고 싶었어? 응? 그래서 사 온 거야?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너!”
“뭐?”

제가 생각하기에도 꽤 멍청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츠키나가는 여전히 웃는 상으로 재잘거린다.

“응응, 라무네 구슬이 아닌 건 아쉽지만~ 이거 세나네 집 가는 쪽 골목길에 있는 데에서 산 거지? 문구점에서 이걸 사는 세나 모습을 생각하니까 새롭고 재미있네! 앗, 인스피레이션이!”

그리고 말을 끝마치자마자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바로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세나는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은 착각 아닌 착각에 빠지고 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이렇게까지 허무하다니. 게다가 레오 군, 지금 은근히 나 놀린 거 아냐? 내가 저걸 얼마나 고심해서 샀는데……. 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았지만, 말문이 막혀버린 건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제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면 그새 작곡을 끝낸 츠키나가가 곡명은 문구점 세나라느니 뭐라느니 떠들기 시작한다. 세나는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이 녀석은 바보다. 게다가 엄청난 어린애다. 곡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인제 와서 짜증 낼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곱게 그 옆에 같이 쭈그려 앉는다.

“……왜 그렇게 라무네 구슬이 갖고 싶었던 건데?”

담담한 어조로 단순한 의문을 입에 담으면 츠키나가는 그건 말이지, 하고 다소 과장된 손짓을 취하더니 손에 꼭 쥐고 있던 작은 자루를 펼쳐 제일 크고 투명한 구슬을 꺼내 들고 제 눈앞에 가져다 대고 푸흐흐 웃으며 세나를 바라본다. 뭐야, 하고 묻자 좀 더 밝은 목소리로 답한다.

“이렇게 보면 세나가 반짝반짝하게 보일 것 같아서!”
“뭐어? 나는 원래 반짝반짝 빛나고 있거든.”
“와하하, 하긴 그렇지! 그래도 선물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어차피 100엔도 안 되는 거니까 막 다뤄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세나가 준 거잖아. 얼마나 소중한데.”

츠키나가는 꺼냈던 구슬을 한 번 바라보더니 곧 조심스레 다시 자루 속에 넣고 매듭을 단단히 묶어 교복 주머니에 넣는다. 마치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보물을 다루는 듯한 그 손길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야.’

오늘은 빈 교실에 에어컨 나올 거라며 활짝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 것만 같아 세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 *

 

“세나 선배?”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면 안즈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들어버렸었지. 많이 피곤하냐는 물음에 고개를 젓고 몸을 일으키면 열려 있는 아이스박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의뢰 주 쪽에서 준비해 주셨어요. 부연 설명과 함께 들여다보면 쿨팩 사이에 푸른 유리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라무네.
주변을 보면 이미 다른 멤버들은 하나씩 손에 들고 있었다. 다들 반쯤 남아있었지만 언제 마시기 시작한 건지 스오우만큼은 이미 한 병을 비운 상태다. 옆에 있는 이를 다시 바라보니 화라도 난 거라고 생각한 건지 그녀는 변명하듯 말을 뜨문뜨문 잇는다. 물론 선배는 안 마실 것 같긴 한데요, 그래도 일단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라나 뭐라나. 딱히 화난 건 아닌데. 세나는 제 뒷목을 매만지다 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몰리더니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한다.

“어? 이즈미 쨩이 웬일로 그런 걸 마셔? 절대 안 마시면서.”
“그냥 그런 기분이야.”
“셋쨩이 드디어 맛이 제대로 갔다~”
“조용히 해, 쿠마 군.”
“역시 Summer에는 라무네로군요! 누님, 여유분이 있다면 한 병 더 마셔도 괜찮을까요?”
“한 병으로 만족해, 카사 군.”

나루카미가 의아해하든, 사쿠마가 비아냥거리든, 스오우가 우는 소리를 내든 적당히 답해준 세나는 제 손에 들린 라무네의 뚜껑을 누르자 탄산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입 마시면 톡톡 쏘는 소다 맛이 느껴진다. 나루카미의 말대로 평소라면 절대 마시지 않는 종류의 음료. 오늘은 날도 더웠고, 자신은 바캉스로 인해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쿠마 군이 말한 대로 맛이 간 걸지도 모르지. 가볍게 자조하며 한 모금을 더 마신다. 지난 기억 속 음료와 같은 맛.

‘그래, 그냥 단순한 변덕이야.’

바보 같은 기억.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했던 추억. 바보처럼 활짝 웃으며 저를 바라보던 표정. 세나는 제 손에 들린 유리병을 바라본다. 안에 든 투명한 구슬이 가볍게 흔들렸다. 선잠 속에서 들여다본 과거의 꿈은 싫지 않았다. 여름 같은 건 역시 정말 싫지만, 그럼에도.
라디오에선 이제 다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세나는 지금 어딘가 자신이 모를 곳에 있을 츠키나가도 라무네를 마실 때마다 같은 기억을 떠올려주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짭조름했다.

레오.png

이전 페이지로

 © 2019.08.03 leoizu love forever created with LIS_SIBA& WIX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