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속愛
w. 다란
시원하고 청량한 나무의 내음이 가득하고 녹음(綠陰)이 짙게 드리운 한여름의 숲 속,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 낡아 보이지만 묘한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신사 한 채가 있는데 이곳엔 오랫동안 산 아랫마을을 지켜온 뱀신 이즈미가 살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은회색 빛을 띠는 뱀의 모습으로 있지만 종종 사람의 모습으로 있기도 했고,
몇 십년 전 인간의 모습으로 신사 옆의 냇가에서 발을 담구던 중 마을 사람과 마주치는 바람에 온 마을에 신사에는 미남자의 모습을 한 신이 산다는 소문이 퍼져 졸지에 한자 '샘 천(泉)'을 딴 '이즈미'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존재를 들킨 것에 대해 스스로를 한심해 하면서도 이름을 가짐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갈 명분을 얻었다는 생각에 내심 기뻐하는 그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마을의 사람들은 하나 둘씩 떠났고, 자연스레 신사도 잊혀져 찾아오는 이가 줄어 지금은 자연의 소리만 주위를 애워싸며 머무를 뿐이었다.
이즈미는 변해버린 인간들이 야속하고 미웠지만 시간이 존재하지 않다고 봐도 무방한 천계와는 달리
인간세계는 변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임을 알기 때문에 그 누구의 탓도 하지 못한 채 시냇물 처럼 고독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마치 구원의 빛 같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거기 누구야? 애들한테 이 숲 속은 위험한데-"
그 날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즈미가 산을 돌아다니던 날이었고 수확이 꽤 좋아 오늘은 간만에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들뜬 마음으로 신사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 곳에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소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냇가에 발을 담구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사람 목소리에 소년은 물장구를 멈춘 뒤 고개를 돌려 이즈미를 보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같이 밝은 녹안, 짙은 노을빛 색을 띠는 머리칼과 왜소한 체구를 가진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 와하하! 내가 어린애 처럼 보여? 재밌네 너~ "
"하아? 어딜봐도 꼬맹이 같은게...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지 그래? "
" 에에- 여기에 있으면 영감이 마구 떠올라서 가기 싫단 말이야! "
" 하..말이 안통하네. 그나저나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대부분 있는지도 모르는데. "
"으음~ 그냥 걷다보니까 여기였어! "
천진난만. 이즈미는 그의 첫인상으로 딱 알맞는 단어라고 생각했지만 마냥 밝아 보이는 모습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듯 했고 그것은 마치 고독함과 외로움의 집합체로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이즈미는 이 소년의 모습에 자신의 마음속에 침몰해 있던 감정들의 큰 덩어리가 투영되는 것을 느꼈고 사사로운 정을 주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만 더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너 이름이 뭐야? "
" 츠키나가 레오! 너는? "
" ..이즈미. "
" 이즈미? 성은 뭔데? "
"..세나. 세나 이즈미야. "
" 오오! 얼굴만큼 이름도 예쁘구나~ 그럼 세나 라고 부를게! "
" 그러든지. "
이즈미는 원래 성과 이름 없이 천계에서 불리는 '세나' 라는 일종의 호만 있었으므로 급한대로 세나 라고 말했다.
그러자 레오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눈이 부시게 빛나는 환한 미소로 평소 관심있는 상대에게나 할 법한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그리고 이즈미는 명색이 수호신 이라는 존재가 츠키나가 레오 라는 고작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에게 휩쓸려
얼굴을 붉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한편으로는 레오에게 그저 꽃의 향기를 따라 앉는 나비처럼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꼈다.
" 오오, 고마워! 세나는 착하구나~ 맘에들어! "
" 크흠- 그건 그렇고, 뭘 그렇게 열심히 적고 있었던 거야? "
" 작곡이야, 내 인생의 전부이자 내가 존재하는 이유. "
마냥 해맑고 천진난만 했던 언동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었고 그 순간, 이즈미는 작은 소년을 짓누르고 있던 어둠을 보았다.
그리고 레오의 빛은 이즈미가 평생을 바래왔던 것이었기 떄문에 도대체 무엇이 밝다 못해 눈이 부신 아우라를 가진 소년을 덮고 있는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그래? 근데 내 눈에는 전혀 안 행복해보여, 그냥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 같아. "
" ...알고있어, 순전히 내 욕심인거. 근데 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힘들어."
" 이유가 뭔데? "
" 완치될 가능성이 희박한 병에 걸린 환자니까."
" 아, 미안..."
이즈미는 아차, 싶었다. 어쩌면 평생 상처로 남을지도 모르는 말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음을 자각했을 땐 이미 물은 엎질러져 사방으로 퍼진 뒤였으며
츠키나가 레오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닌데, 이즈미는 남에게 상처를 줬다는 죄책감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고
싸늘한 정적은 꽤나 오랫동안 두 사람의 사이에 흘렀다.
" 뭐 괜찮아~ 세나는 나랑 오늘 처음 만났으니 모르는게 당연하지! 신경쓰지마~"
" ...그래도 미안해,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
" 진짜 괜찮대도~ 뭐, 그렇게 미안하면 여기서 머무르는 동안 놀아주면 되는거지! "
" 뭐..알았어. 근데 너 아랫마을로 이사온 거 아니었어? "
" 아, 요양 차 잠깐 머무르는거야! 언제까지 있을지는 나도 몰라. "
" 그래? 그럼 만약에..."
" 응? "
" ..아니야, 그보다 뭐하고 놀고 싶은데? 설마 작곡하는 동안 말동무 하자는 건 아니겠지? "
" 와하하핫! 세나, 너 진짜 재밌는 애구나? 맘에 들어~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길었던 정적을 깬 건 레오였다. 마치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괜찮다고 말하는 그는 도리어 이즈미를 위로하였고, 두 사람은 풀어진 분위기를 타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대화를 이어가던 이즈미는 차마 건강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는 말은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다시 속으로 삼켰다.
이 말을 했다가는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옥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즈미의 마음 속에서 츠키나가 레오는 자신의 힘이 닿는 데 까지 지켜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샘솟았다.
인간을 보호해주고 해를 입지 않게 지켜줘야 수호신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츠키나가 레오, 너만은 무슨일이 있어도 지켜낼거라고 맹세하는 이즈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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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고 둘이 함께 지낸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갈 쯤이었다. 레오는 하루에 한 번은 신사에 찾아와 이즈미를 불렀고 이즈미는 레오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하던 일도 마다하고 버선발로 맞아주며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레오는 이즈미가 있는 신사를 찾아왔는데,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기류를 풍겼고 졸지에는 대화가 끊기고 정적이 흐르기까지 했다.
이즈미는 레오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곤 말을 멈추었고 그의 입에서 무슨말이 나올 때 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 ...세나, 나 건강이 더 나빠졌어.. 그래서 이 마을을 떠나야 해."
" 뭐? "
" 사실 저번주 부터 몸 상태가 안좋다는 거 알았는데, 말하면 세나가 걱정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했어.."
" ..너 바보야?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맨날.... "
" 정말 미안해 세나..그치만 나는 네 마음이 불편한걸 보고 싶지 않았어..그래서 그런거야. "
" 내 마음이 불편하면 뭐 어때서..? 내가 그정도도 감당 못할 거였으면 애초에 너를...지켜주겠다고 맹세하지 않았어. 근데 어떻게... "
레오의 입술이 벌이지며 나온 말을 들은 이즈미는 당장에라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도 모자랄 상태의 환자인 레오가 매일같이 산에 오르내리는게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제 욕심에 괜찮을거라 생각하며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던 탓에
레오의 상태가 악화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온전하던 그의 세상은 이로써 산산조각이 났다.
" 나한테도 세나는 소중하니까..네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 수 있을만큼 너는 나의 전부야. "
" 레오군... "
" 나, 어떻게 해서든 나아져서 세나한테 올거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주면 안될까..? "
" ...당연한 거 허락받지 마. "
" 고마워 세나..그리고 내가 돌아오는 그 날, 나의 연인이 되어줄래? "
" 응, 레오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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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청량한 나무의 내음이 가득하고 녹음(綠陰)이 짙게 드리운 한여름의 숲 속,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 낡아 보이지만 묘한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신사 한 채가 있다.
츠키나가 레오가 떠난 후 3년 정도가 지났을까, 그가 곳곳에 남겼던 흔적은 자연에 덮어진지 오래였고 신사 안쪽 한켠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곳이 생겼다.
그리고 신사의 주인인 이즈미는 매일 참배를 하며 마지막으로 봤던 레오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다 지쳐 잠에 드는 하루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즈미는 어김없이 쓰러지듯 잠에 들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보살펴주는 좋은 꿈을 꿨다. 그런데 간만의 편한 잠자리 때문이었을까,
꼭 감겨있던 두 눈이 저절로 떠지더니 푸른색의 아름다운 두 눈동자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가득 맺혔다.
" 세나, 나왔어. "
-Fin-
